무의식과 수련

imita 2006. 8. 19. 14:01

나와 나의 짝의 수행이 이제 고지에 다다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서로 잘났다고 내세우는 맘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로를 위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오늘 응아를 하면서 생각해본다.

그 옛날 함께 공부하면서 이 생에 다시 만나서 함께 도인이 되기로 한 맹세가 있었지 않았는가 하고

지금의 이 모든 상화이 우리가 계획해놓은 것만 같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되기 위하녀 발원한 것이

지금의 환경으로 우리를 안내한 것 같다.

 

저번에는 정말 화가 나서 티격태격(아주 심하게)하다가 자고난 후

아침에 일어나서 역시 응아하면서 올라오는 생각이

예전에는 정말 벗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날 따라 다시 태어나도 내 짝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 이상 미워하는 마음,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남겨둘 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내 짝을 진정한 짝지로 만들고 싶게 되었다.

 

짝, 짝지

참으로 정감있는 말이다.

싫던 좋던 짝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살다가 만나서 헤어지는 그런 짝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벗어려는 생각도 없고 하나가 되려는 생각도 없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남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폐기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나가 있어서 한 짝으로 존재하지

하나는 반짝일 뿐이다.

 

나는 이 시대에서 부부도인이 되고자 하는 원을 가지고 있다.

나 혼자 도인이 아니라 한 짝을 이룬 도인이 되고 싶다.

가정을 버리지 않는 도인,

지혼자 잘난 도인이 아닌,

이 시대 이 당에서 건전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도인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다.

더욱이 짝이 틀어져 있을 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 방향을 보고, 비슷한 발걸음을 내딛기에

목표가 눈 앞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나가 빨라서 목표애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짝이 옆에 있음으로 그 목표가 가까워진 것이다.

이것이 짝의 위력인가 싶다.

 

짝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마음으로 있는 다는 것은

절대고독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짝과의 이별을 원하는 사람은 결토 자신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짝이 곧 자신임을 안다면 이별을 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짝은 곧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