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짝의 수행이 이제 고지에 다다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서로 잘났다고 내세우는 맘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로를 위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오늘 응아를 하면서 생각해본다.
그 옛날 함께 공부하면서 이 생에 다시 만나서 함께 도인이 되기로 한 맹세가 있었지 않았는가 하고
지금의 이 모든 상화이 우리가 계획해놓은 것만 같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되기 위하녀 발원한 것이
지금의 환경으로 우리를 안내한 것 같다.
저번에는 정말 화가 나서 티격태격(아주 심하게)하다가 자고난 후
아침에 일어나서 역시 응아하면서 올라오는 생각이
예전에는 정말 벗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날 따라 다시 태어나도 내 짝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 이상 미워하는 마음,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남겨둘 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내 짝을 진정한 짝지로 만들고 싶게 되었다.
짝, 짝지
참으로 정감있는 말이다.
싫던 좋던 짝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살다가 만나서 헤어지는 그런 짝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벗어려는 생각도 없고 하나가 되려는 생각도 없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남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폐기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나가 있어서 한 짝으로 존재하지
하나는 반짝일 뿐이다.
나는 이 시대에서 부부도인이 되고자 하는 원을 가지고 있다.
나 혼자 도인이 아니라 한 짝을 이룬 도인이 되고 싶다.
가정을 버리지 않는 도인,
지혼자 잘난 도인이 아닌,
이 시대 이 당에서 건전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도인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다.
더욱이 짝이 틀어져 있을 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 방향을 보고, 비슷한 발걸음을 내딛기에
목표가 눈 앞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나가 빨라서 목표애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짝이 옆에 있음으로 그 목표가 가까워진 것이다.
이것이 짝의 위력인가 싶다.
짝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마음으로 있는 다는 것은
절대고독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짝과의 이별을 원하는 사람은 결토 자신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짝이 곧 자신임을 안다면 이별을 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짝은 곧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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