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음을 몽땅 비웠다면
마음이라는 거울에 묻은 때를 완전히 청소하였다면,
어떤 이는 거울 마저도 깨어버리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하고,
완전히 바탕만 남은 거울은 자신이 거울인지 아닌 지를 모른 체로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비치는 존재가 곧 자신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이 앞에 선 물체와 동화되어버린다.
우리 마음이라는 거울은
비워진 상태에서 한 생각을 떠올리면
그 생각이 곧 나인 것으로 되어버린다.
그래서 예수를 생각하면 예수의 입장이 되어버리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입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일시적으로 비워진 상태일지라도 그러한 것이다.
이 때 인식하는 대상의 에너지와 마음은 공명을 일으킨다.
곧 그 대상의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빙의,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므로 빙의라 할 수 없고
대상의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모방 또는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입장만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켜서 그와 같은 에너지 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마치 즐거운 생각을 하면 나가 즐겁고 주변이 즐거워지고
슬픈 생각을 하면 나가 슬퍼지고 주변이 슬퍼지고
괴로운 생각을 하면 나가 괴롭고 주변이 괴로워지는 것과 같다.
부처가 어떠한지
예수가 어떠한 지 몰라도
그 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자문자답을 통하여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과의 대화법이요, 채널링의 원리이다.
우리가 어느 순간 잘 아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답이 퍼떡나올 때가 있다.
아 절마가 그렇구나. 하듯이 답이 나올 때가 있다.
도를 하던 하지않던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대상이 신이나 성인들이 되어버리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인들에 대한 마음을 일념으로 가지고 그와 에너지 공명을 일으키면
곧 그가 나를 항상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방법을 사용하여도 종교가 만드어질 수 있고
사이비 세상에서도 사이비가 완전한 사이비가 아닌 것이 되어
사이비가 활성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 내 마음이 비워지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에 담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허투른 생각을 말아야 하며
괴로움이나, 슬픔 등의 부정적이라고 하는 에너지를 멀리 하여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을 접을 줄 알고
전체를 위하여 마음을 사용하고, 노력하여
그 마음의 에너지 장이 주변을 가득 채울 때 누가 뭐라하여도
부처가 되어가고,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성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내면에서 나오는 내용은
"모든 님이시여 행복하소서"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할지라도
못내 이 마음을 비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거나 유사한 내용이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면
영원히 자신의 욕구 속에서 헤메게 되고
영원히 자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며
결국 천국, 극락을 가더라도 자신의 천국과 극락에 가게 되고
행복하다고 하여도 자신만의 행복 속에 빠질 뿐이다.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마주하는 존재와 마음을 왕창열어놓고 함께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내 마음을 비운 후에 무엇을 비추느냐에 따라서]나의 에너지 장은 바뀌게 되고
그 에너지 장이 또한 곧 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거울이라 하는 까닭이기도 하고
이러한 것이 에너지 디자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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