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수련
자아완성
imita
2006. 7. 7. 19:08
인간사 최고의 목표는 자아완성이라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수많은 시험에 답으로 적었다. 절에 다니면서, 명상하면서, 대화 속에서 자아완성을 위하여 자아를 열심히 찾고 다녔다. 먼저 자아가 뭔지 알아야 하니까? 그런데 내 여섯살의 경험에 자아완성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었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울고 불고 앙탈을 피우는 어린아이의 자아완성이었다. 그런데 나의 큰 놈은 뭐가 좀 다르다. 그 놈은 쉽게 포기해버린다. 좀 해보다가 말리면 안해버린다. 나는 여섯살에 알았는데 그놈은 12개월도 되기 전에 앙탈스러운 자아완성을 포기하였다. 나의 여섯 살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5남 3녀(누나, 누나, 형, 형, 형, 형, 나, 누이)중에 꼬바리였다. 이 중 내가 투쟁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세 살 위의 네째 형 하나 뿐이었다. 그 위의 존재들은 투쟁 대상 밖이었고 세살 어린 동생은 밥이었으니까. 여 섯 살 바지를 홀랑 벗고 놀러 다니던 그 시절에 옴매가 진주 시내에서 근무하시던 아부지한데 감시로 네째 세이와 내한테 라면땅 한가마니 씩을 사주싰다. 내는 야금야금 애끼면서 묵었고 세이는 얼른 무뿠다.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성질도 차이가 있었다. 지껄 다 문 세이는 안주까지 남아있는 내 라면땅을 쳐다봤다. 순간 내껄 노리는 줄 알았다. 그 때 까지 숫하게 당했으니까. 야 쪼매만 도, 안다 쪼매만 도, 안한다 안카나. 다음에 한봉지 사주께, 실어, 전에도 그래놓고 안줏잔아 야 이번엔 진짜다. 꽁까지 마라, 좀도, 안다. ............. 좀도, 안다. 좀도, 자꾸 그라모 던지삔다.(앙탈을 부리면 형이 달래야 하는 령재 간의 법칙, 동생 울리면 위 선에서 당하니까) 야 그라지 말고 좀도. 좀도, 안다. ............. 좀도, 안다. 하참을 이러다가 성질 난 나는 방바닥에 라면땅 반봉지를 던졌고, 온 방바닥에 라면 땅이 펼쳐졌다. 그리고 난 신경질로 씩씩러리고 있었다. 그때 네쩨 세이는 야 주다마라, 아아아 주 다마라, 아아아 안다므모 내가 무뿐다. 무라 (다른 형들한데 일러주면 혼나니까 그것 믿고서 큰소리 쳤지) 내가 묵는다. 무라 진짜로 묵는다. 무라 네쩨 세이는 사정없이 방바닥에 있는 라면땅을 먹어치우기 시작하였고 그동안 나는 악을 쓰면서 울고 있었다. 때리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내임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라면땅 때문에. 잠시 울고 나니 방바닥에 라면땅이 하나도 없었다. 네쩨 제이의 입속으로 다 들어가 버렸다. 그 때 내 머리와 마음을 때리는 각성이 일어났다. 떼를 쓰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나. 떼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 떼를 쓰봐야 나만 손해로구나. 그 사건이 있은 후 나의 욕심은 최소한의 내것만 지키는 방향 누구나 내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만 챙기게 되었고 명절날 다 사주는 선물이 없어도 떼쓰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울고불고 떼쓰는 것 보다는 내 마음 편한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마음 편한 것을 찾아다닌 기나긴 마음공부의 시작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나의 자아를 찾아서 떠나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투쟁이라는 개념, 싸워서 쟁취한다는 개념이 없어져버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것, 다 빼앗기고도 남는 것 그것만이 나의 것으로 남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권리는 없고 의무만 남는 결과를 나앟다. 중략 불혹의 나이에 사람들을 마음공부 안내할 기회가 주어졌다. 정말 가슴뛰는 일이었다. 정말 재미있고, 나의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어면서 안내하였다. 코피를 쏟아가면서. 사람들을 안내하면서 괴롭고 복잡한 마음을 단순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일주일 마음공부하고서 거울앞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니 부처가? 라고 물을 때 겸허하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수련의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들은 은은한 미소를 띄면서 일주일의 수련을 마감하곤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공허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왜 그럴까? 생각 해보니 이 세상에 나와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요즈음 외계에서 온 영혼들의 소명의식과 같이 자신이 하여야 할 일들... 그럼 그것이 무얼까? 각각의 사람들마다 다 다를텐데... 공부방법은 살아온 삶들을 뒤돌아보면서 그 삶들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또 객관적인 입장에서 절대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며 참회, 화해, 용서하고 용서받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용서하고 화해하고 부처가되어도 그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으니 뭔가 하나가 빠질 수 밖에 없고 결국은 허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순간 자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시절 3-6세 사이에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펴보라고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에 있었던 기억 속에 자신의 삶의 방향이, 숙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숙제를 하면서 살아온 사람은 공부 후 허전함이 없는 삶을 살고 숙제를 접어놓은 사람은 마음공부를 아무리 하여도 허전함이 남는 것을 알게 되었다. 3-6세에 삶에 대한 숙제를 떠올리지 못한 사람은 국민학교 중학교로 진행하면서 그것을 찾아내 보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 답들을 찾아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자아완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종교나 이념, 철학 등에 의한 자아완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식이 형성되면서 가장 순수하던 시절에 그리고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음이 결국 내가 살아가는 마음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이루저지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허전함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밑바탕에서 출발한 의식은 계속 그 바탕 위에 다른 것들을 쌓을 테니까 그것을 완전히 해소하거나 버리지 않은 상태로 다른 것들을 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불만족의 연속인 것이다. 그리고 일설에는 6살 정도까지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전생의 기억이기보다는 막연한 느낌과 의문, 관심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를 전생의 기억이라하던, 태교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던, 아니면 세상에 나와서 형성되었던 살아오면서 그것의 바탕을 가지고 다른 것들이 영향을 받으면서 의식이 성장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거나, 해소하는 것이 인생에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시절의 의식은 순수하기에 남을 위하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경우 삶과 죽음에 관한 의문 심한 빈곤을 겪은 사람은 부 핍박을 받은 사람은 권력 이별한 사람은 애증 등에 집착하거나 강한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하게되고 그것이 해소 되어야만 진정한 해탈 진정한 사랑의 길을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 사람의 구도길은 편안하고 그것을 접어두고 가는 이는 상당히 곤란한 경우를 겪게 되거나 공부 자체의 진행이 어렵고 더디고 윤회의 자국만 남기기 쉽다. 고로 내가 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내 마음 속의 깊은 울림을 찾아내서 해소하지 못하면 진정한 오르가즘의 세계로 나아가기 어렵고 내 속의 불만족의 정체를 찾아서 해결하면 그 순간부터 행행이 오르가즘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높은 자와완성 이전에 내 속에 있는 작은 자아완성을 이루는 것이 저 높은 자아를 완성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며 이 글이 모든 나누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